티스토리 뷰
목차
할 일이 많을수록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이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습니다.
메일도 보내야 하고, 밀린 일도 처리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집도 정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막상 책상에 앉으면 손이 안 갑니다.
휴대폰을 한번 봤다가 냉장고를 열고, 갑자기 책상을 정리하다가 다시 휴대폰을 봅니다.
시간은 계속 지나가는데 정작 중요한 일은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결국 나를 탓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르지?'
그런데 정말 게을러서 그런 걸까요?
때로는 할 일이 없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시작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할 일이 많아지면 '해야 한다'는 압박도 함께 늘어난다
할 일이 하나 있을 때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 다섯 개, 열 개로 늘어나면 머릿속도 복잡해집니다.
'뭐부터 하지?' '이것도 급한데.' '저것도 오늘까지인데.'
거기에 완벽주의까지 더해지면 일이 더 무거워집니다.
'제대로 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잘해야 하는데.' '실수하면 안 되는데.'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머릿속에서는 벌써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하고 있는 셈입니다.
미루기를 오랫동안 연구한 심리학자 Piers Steel의 메타분석에서도 미루기는 단순한 게으름 하나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하기 싫고 부담스러운 과제, 낮은 자기효능감, 충동성, 자기조절 등 여러 요인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시작하지 못하는 날도 있다"
왜 중요한 일을 두고 자꾸 다른 걸 하게 될까?
심리학자 Fuschia Sirois와 Timothy Pychyl은 미루기를 '시간관리의 실패'만이 아니라 감정조절의 문제로도 설명합니다.
해야 할 일을 떠올렸는데 부담스럽습니다. 실패할까 봐 걱정됩니다. 하기 싫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불편한 감정을 당장 줄여주는 행동으로 쉽게 이동합니다.
SNS를 보거나, 영상을 보거나, 별로 급하지 않은 다른 일을 시작하는 식입니다.
중요한 일을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일을 생각할 때 느끼던 불편함에서는 잠시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미루기는 때때로 이렇게 흘러갑니다.
해야 할 일 → 부담 → 회피 → 잠깐 편안함
문제는 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일의 나에게 넘어갔을 뿐입니다.
90페이지 논문을 3일 전에 시작한 사람
이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설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유명 블로그 Wait But Why의 작가 Tim Urban입니다.
그는 대학 시절 1년에 걸쳐 써야 하는 90페이지짜리 졸업논문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계획도 훌륭했습니다. 조금씩 시작해서 중간에 속도를 올리고 마지막에 마무리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마감 3일 전까지 한 글자도 쓰지 못했고, 마지막 72시간 동안 거의 밤을 새워 논문을 완성했다고 TED 무대에서 이야기합니다.
Tim Urban은 이런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재미있는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즉각적 만족 원숭이(Instant Gratification Monkey)'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지만 원숭이는 말합니다.
'그것보다 지금 재미있는 것부터 하자.'
그러다가 마감이 코앞에 닥치면 또 다른 캐릭터인 '패닉 몬스터(Panic Monster)'가 깨어납니다.
그제야 갑자기 엄청난 집중력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물론 원숭이나 패닉 몬스터가 실제 뇌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Tim Urban이 미루는 경험을 재미있게 표현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익숙하지 않나요?
"해야 하는 건 아는데 왜 나는 다른 걸 하고 있지?"
많은 사람이 미루면서 경험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미룬 뒤 자책하면 더 힘들어질 수 있다
문제는 일을 미룬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다음부터 자신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또 미뤘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 '역시 나는 게을러.'
그러면 기분이 더 가라앉습니다.
해야 할 일은 그대로인데 마음의 부담까지 하나 더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오늘 일을 미뤘다'와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는 다른 말입니다.
하나는 오늘의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는 사람 전체에 대한 판정입니다.
"미루어서 힘든데 나까지 나를 비난하면 다시 시작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특히 '잘해야 한다'는 사람에게 시작은 더 무거울 수 있다
할 일이 많아서 힘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 다른 부담이 숨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잘해야 해.' '실수하면 안 돼.'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안 돼.' '내 마음에 들 정도는 해야 해.'
이런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블로그 글 하나 쓰기'가 아니라 머릿속에서는 이미 '조회수도 잘 나오고, 내용도 좋고, 이미지도 예쁘고, 검색에도 잘 잡히는 완성도 높은 글을 써야 한다'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첫 문장을 쓰기도 전에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목표를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시작의 크기를 줄일 수 있습니다.
'글 하나 완성하기'가 아니라 → 제목 세 개 적기.
'운동 한 시간 하기'가 아니라 → 운동복 입기.
'집 정리하기'가 아니라 → 책상 위 물건 다섯 개 치우기.
"목표를 작게 만들 필요는 없다. 대신 시작을 작게 만들 수는 있다"
할 일이 많을 때 제가 먼저 해볼 질문
저도 할 일이 한꺼번에 많아지면 오히려 손을 대기 싫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를 돌아보면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보다, 머릿속에서 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돌아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제대로도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지쳐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순간에 저 자신에게 물어보려고 합니다.
'나는 정말 하기 싫은 걸까, 아니면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하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지금 할 것 하나를 정합니다.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르지?'라는 자기비난에서 조금 벗어나 지금 필요한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할 일이 산더미일 때는 이렇게 해보세요
거창한 시간관리법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됩니다.
먼저 머릿속에 있는 일을 종이나 메모장에 꺼내놓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만 해봅니다.
- 지금 가장 먼저 할 것 하나를 고릅니다. 모든 일의 완벽한 우선순위를 정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 그 일을 가장 작은 행동으로 바꿉니다. '발표 준비'가 아니라 '파일 열기'. '공부하기'가 아니라 '책 펴기'.
- 10분만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할 힘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할 수 있을 만큼 문턱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지속된다면 '게으름'이라고 넘기지 마세요
여기서는 한 가지 구분이 필요합니다.
특정한 일을 며칠 미루는 것과 삶 전반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평소 좋아하던 것에도 흥미가 떨어지고, 집중이나 수면·식욕 등에 변화가 생기며, 일상생활 자체가 계속 힘들다면 단순한 미루기나 의지 문제라고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번아웃이나 우울 상태 등 다른 문제가 있는지는 전문가의 평가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나는 게을러'라고 스스로 진단해버리면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살펴볼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 계속되는 무기력을 ‘내가 게을러서 그래’라고 단정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질문을 바꿔보자
해야 할 일이 많은 날 우리는 쉽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르지?'
하지만 이 질문은 나를 평가합니다.
대신 질문을 조금 바꿔보면 어떨까요?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시작하기 어려운 걸까?'
일이 너무 많은가. 너무 잘하려고 하는가. 실패가 걱정되는가. 지쳐 있는가. 아니면 정말 하기 싫은 일인가.
원인이 다르면 필요한 방법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오늘 모든 것을 해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시작하면 됩니다.

3줄 정리
- 할 일이 많을수록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경험을 무조건 게으름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미루기는 과제에서 느끼는 불편함, 실패에 대한 걱정, 자기조절과 감정조절 등 여러 요인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왜 이것도 못 하지?"보다 "무엇이 지금 시작을 어렵게 만들고 있지?"라고 묻는 것이 더 도움이 됩니다.
-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해결하려 하지 말고, 지금 할 일 하나를 고른 뒤 시작의 크기를 줄여보세요.
참고자료
- Piers Steel, The Nature of Procrastination: A Meta-Analytic and Theoretical Review of Quintessential Self-Regulatory Failure, Psychological Bulletin, 2007.
- Fuschia M. Sirois & Timothy A. Pychyl, Procrastination and the Priority of Short-Term Mood Regulation: Consequences for Future Self, 2013.
- Tim Urban, Inside the Mind of a Master Procrastinator, TED2016. '즉각적 만족 원숭이'와 '패닉 몬스터'는 뇌과학적 구조가 아니라 미루기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