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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를 하다가
낮에 들었던 말이 떠오릅니다.
그때는 그냥 넘겼는데,
혼자 있으니 다른 대답이 생각납니다.
‘그렇게 말할 걸.’
잠깐 다른 일을 하다가도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상대의 표정,
말투,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순간까지.
이미 끝난 일인데
내 안에서는 대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왜 잊고 싶은 일일수록
자꾸 생각나는 걸까요.
기억에서 질문으로
불쾌했던 일이 떠오르는 것과
그 일을 계속 곱씹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처음에는 그저
장면 하나가 생각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곧 질문이 붙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만만해 보였나.’
‘나는 왜 그때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까.’
기억을 떠올리는 데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상대의 의도를 추측하고
나 자신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괴로운 감정과 그 원인, 결과를
반복해서 생각하는 양상을 반추라고 부릅니다.
다만 불쾌한 기억이 떠오른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반추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생각하면 풀릴 것 같아서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일을 만나면
다시 생각해 봅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면
다음에는 다르게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돌아봄이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많이 했다는 것과
답에 가까워졌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찾아보니 이 주제를 오래 연구한 학자가 있더라고요.
평생 반추를 연구한 심리학자 수전 놀렌혹세마는
2008년에 동료들과 함께 그동안의 연구를 종합한 리뷰 논문을 냈습니다.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반추는 우울을 악화시키고, 부정적인 사고를 강화하며, 문제 해결을 방해하고, 실제 행동을 가로막고, 사회적 지지를 약화시킨다.”
문제를 풀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더라도,
생각이 같은 자리를 돌면서
괴로운 기분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주제를 일반 독자를 위한 책으로도 썼습니다.
국내에는 《생각이 너무 많은 여자》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있어요.
부정적인 감정과 함께 생각이 끝없이 이어지는 상태를
‘과도한 생각’이라고 부르며,
그런 흐름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다룬 책입니다.
제목만 보면 여성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읽어보면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한 장면이 나 전체가 될 때
‘그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특정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이어지면
문장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나는 왜 늘 이럴까.’
‘나는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툰가 봐.’
한 번의 대화가 어느새
나라는 사람 전체를 설명하는 말이 됩니다.
상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나에 대한 결론은 점점 단단해집니다.
싫었던 일을 돌아보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나 자신까지 싫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같은 일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반복해서 생각하는 일이
언제나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심리학자 에드워드 왓킨스는 같은 해 발표한 리뷰에서
반복적 사고의 결과가 생각의 내용과 상황,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정리했어요.
특히 부정적인 경험을 다룰 때,
추상적인 의미와 평가에 머무는 방식과
구체적인 상황을 살피는 방식의 차이에 주목했습니다.
일상으로 옮겨 보면
이런 차이일 것입니다.
‘나는 왜 항상 무시당할까.’
그리고,
‘그 대화에서 어떤 말이 불편했을까. 다음에 비슷한 말을 들으면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둘 다 같은 일을 돌아보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나 전체에 대한 판정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순간과 다음 행동을 향합니다.
질문을 바꾼다고
곧바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생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조금 더 보일 수 있습니다.

내가 놓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싫었던 일을 곱씹을 때,
그 장면에서 무엇이 불편했는지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말의 내용이었을까.
말을 꺼낼 틈이 없었던 것이었을까.
내 마음이 가볍게 취급됐다고 느낀 순간이었을까.
이것은 모든 반복되는 기억의 원인을 설명하는
연구 결론은 아닙니다.
다만 상대의 속마음을 끝없이 추측하던 자리에서,
내가 실제로 경험한 불편함으로
시선을 옮겨 보는 질문입니다.
상대가 왜 그랬는지는
끝내 알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내가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는
조금씩 알아갈 수 있습니다.
대화가 끝난 뒤에도
싫었던 일이 떠오른다고 해서
내가 유난히 약하거나 마음이 좁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반복되는 기억을
모두 하나의 이유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이 글에서 참고한 연구들은
주로 반추와 반복적 사고를 다룹니다.
일상의 모든 불쾌한 기억이
같은 과정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장면이 다시 찾아왔을 때,
잠깐 구분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그 일을 조금 더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같은 질문으로
나를 다시 아프게 하고 있을까.
오늘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된 장면이 있나요?
그 장면에서 실제로 불편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내 생각이 그 순간을 향하고 있었는지, 나 전체를 향하고 있었는지.
이미 끝난 대화 속에서 나는 아직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참고자료
Nolen-Hoeksema, S., Wisco, B. E. & Lyubomirsky, S. (2008). Rethinking Rumination. 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 3(5), 400–424.
Watkins, E. R. (2008). Constructive and Unconstructive Repetitive Thought. Psychological Bulletin, 134(2), 163–206.
수전 놀렌혹세마, 《생각이 너무 많은 여자》(원제 Women Who Think Too Much), 나선숙 옮김.
※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이며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생각이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로 이어진다면 전문가와 이야기 나눠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