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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물을 자주 잊어버리는 아이, 혼낼수록 더 못 챙기는 이유
육아 심리 · 아동 발달 | 9분 읽기

저에게도 참 익숙한 말입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준비물과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 많이 혼났습니다. 그리고 혼난다고 다음부터 더 잘 챙겨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또 실수하면 혼날 것이라는 생각에 긴장하고, 급하게 챙기다 보면 또 무언가를 빠뜨리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저 역시 자연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덤벙거리지?' '왜 남들이 쉽게 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지?'
이런 생각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나는 덤벙거리고,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제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어린 시절 반복해서 경험한 실수와 그때마다 들었던 말들은 단순히 그 순간의 기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제가 저 자신을 바라보는 자아상의 일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의 반복되는 실수를 볼 때, 행동만 고치려 하기 전에 그 경험을 통해 아이가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배우고 있는지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행기능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준비물을 챙기는 것은 어른이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한 행동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준비물 하나 챙기는 데도 여러 뇌 기능이 필요합니다
내일 미술시간에 색연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이에게는 단순히 '색연필 가져가기'라는 한 가지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단계가 성공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정보를 잠시 유지하고 사용하는 작업기억, 해야 할 일을 계획하는 능력, 물건을 조직하는 능력, 자신이 빠뜨린 것은 없는지 확인하는 자기점검 등이 관여합니다. Harvard Center on the Developing Child는 실행기능을 정보를 유지하고 활용하며, 주의를 집중하고, 방해 자극을 걸러내고, 상황에 따라 행동을 전환하도록 돕는 능력으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능력은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며 계속 발달합니다. 즉 아이가 준비물을 잊었다고 해서 항상 "책임감이 없어서"라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2. "알았어"라고 했는데 왜 5분 뒤에 잊어버릴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작업기억(Working Memory)입니다. 작업기억은 단순히 무언가를 외우는 기억력과 조금 다릅니다. 지금 필요한 정보를 잠시 머릿속에 붙잡아두고, 그 정보를 이용해 행동하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말합니다. "방에 가서 체육복 가져오고, 물병 씻어서 가방에 넣고, 알림장도 확인해."
아이는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방에 들어간 순간 눈앞에 있던 장난감에 관심이 갑니다. 그리고 몇 분 뒤, '내가 여기 왜 왔지?'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아이에게 "아까 말했잖아"라고 반복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말하기보다 "먼저 체육복을 가져오자."처럼 지시를 한 단계씩 줄여주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3. 자꾸 잊어버리는 아이, 혼내면 정신을 차릴까요?
저는 이 부분을 제 어린 시절 경험 때문에 더 생각하게 됩니다. 준비물을 잊어버릴 때마다 혼나면 다음부터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지만, 제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복해서 혼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나는 원래 잘 잊어버리는 아이야.' '나는 왜 이것도 제대로 못하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실행기능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에게 어려운 행동을 의도적인 불순응으로만 해석해 처벌하는 것보다, 아이의 현재 능력에 맞게 요구 수준을 조절하고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Harvard 아동발달센터도 설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준비물을 자꾸 잊어버리는 아이에게 필요한 질문이 "왜 또 잊어버렸어?"보다 "다음에는 기억할 수 있게 어떤 방법을 만들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4. "잘 챙겨" 대신 시스템을 만들어주세요
준비물을 자주 잊어버리는 아이에게 "내일부터 잘 챙겨"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주문입니다. '잘 챙기는 방법' 자체를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외부 구조 (scaffolding)입니다.
Harvard 아동발달센터는 비계(scaffolding)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 임시 구조물이 건물을 받쳐주듯, 아이가 실행기능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어른이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고 능력이 발달하면서 그 지원을 점차 줄여가는 것입니다.
| 자주 생기는 문제 | 바꿔볼 방법 |
| 준비물을 기억하지 못함 | 눈에 보이는 체크리스트 |
| 여러 지시를 잊음 | 한 번에 한 가지씩 말하기 |
| 물건을 자주 잃어버림 | 물건마다 고정된 자리 만들기 |
| 아침마다 빠뜨림 | 가능하면 전날 같은 시간에 준비 |
| 가방에 무엇이 있는지 모름 | 가방 속 물건의 위치 고정 |
| 부모가 매번 챙겨줘야 함 | 부모 확인 → 함께 확인 → 혼자 확인 순으로 전환 |
핵심은 부모가 대신 챙겨주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말해줍니다. 다음에는 아이와 체크리스트를 함께 봅니다. 조금 익숙해지면 아이가 스스로 체크하고 부모는 마지막에 확인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아이 혼자 할 수 있도록 부모의 도움을 줄여갑니다. 이렇게 외부에 있던 구조를 아이 안의 습관으로 옮겨주는 것입니다.
5. 준비물 체크리스트는 이렇게 단순해야 합니다
체크리스트를 너무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 가기 전이라면, 이 정도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알림장 확인
- 숙제 넣기
- 오늘의 특별 준비물 넣기
- 물병 넣기
- 가방 닫기
그리고 매일 바뀌지 않는 물건보다 그날 특별히 챙겨야 하는 준비물이 눈에 띄도록 만드는 것도 좋습니다. 처음에는 부모와 함께 체크하고 점차 아이가 직접 체크하게 합니다. 실행기능은 아이가 태어날 때 완성되어 나오는 능력이 아니며, 경험과 연습을 통해 발달합니다. Harvard 아동발달센터 역시 연령에 적합한 활동과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실행기능과 자기조절 능력을 지원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6. 준비물을 잊어버리면 ADHD일까요?
그것만으로 ADHD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거나 준비물을 잊는 행동은 실행기능의 어려움과 함께 나타날 수 있고, ADHD가 있는 아이에게도 흔히 관찰됩니다. 하지만 실행기능의 어려움은 ADHD가 없는 아이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Child Mind Institute 역시 실행기능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에게 중요한 물건을 자주 잃거나 잊고, 숙제를 끝내거나 제출하는 데 어려움을 보이는 모습이 나타날 수 있으며, ADHD가 없는 아이도 실행기능 문제를 겪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준비물을 자주 잊는다 = ADHD"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아이의 나이에 비해 정도가 두드러지는지, 오랫동안 지속되는지, 준비물뿐 아니라 숙제·시간관리·정리정돈·과제 시작 등 여러 영역에서 어려움이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의 '기억력'보다 먼저 바꿔볼 것
준비물을 또 놓고 온 아이를 보면 부모는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린 시절 그렇게 많이 잊어버리던 아이였기에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아이가 기억을 잘하도록 계속 혼내기보다, 잊어버려도 다시 챙길 수 있는 시스템을 먼저 만들어주는 것. 물건의 자리를 정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정하고,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처음에는 함께 확인하다가 조금씩 부모의 도움을 줄여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경험해야 하는 것은 "나는 왜 이것도 못하지?"라는 실패가 아니라, "이 방법을 사용하니까 나도 챙길 수 있네."라는 작은 성공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준비물을 챙기는 연습의 진짜 목표는 물건 하나를 잊지 않는 아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방법을 하나씩 알아가는 아이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 Harvard Center on the Developing Child, "InBrief: Executive Function" — developingchild.harvard.edu
· Child Mind Institute, "How Do I Know If My Child Has Executive Function Issues?" — childmind.org
태그: 준비물잘챙기기, 실행기능, 아동ADHD, 산만한아이, 작업기억, 육아정보, 아동발달, 부모교육, 스캐폴딩, 자기조절